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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년의 이어온
    섬유 안동포

    안동
    안동포마을

    그맥을 이어가는 마을
    안동 임하면 금소리
    의혈의 고장 금소 이미지1

    ‘安東은 獨立運動의 聖地‘라고 불리웁니다.

    그 이유로 甲午義兵이 일어난 한국독립운동의 발상지, 독립유공자를 가장 많이 배출한 고장, 전국적 대표성을 지닌 독립운동사에서 뛰어난 지도자를 많이 배출한 고장, 일제 강점기에 가장 많은 순절지사를 배출한 고장이바로 안동입니다.

    조용히 머물며 자신을 닦다가 나라와 민족이 위기에 처하면 자기 한 몸 아낌없이 희생하던 지사들의 고장,

    독립운동에 목숨 바친 사람들이 가장 많은 고장이 안동입니다. 안동포마을에서도 나라가 어려웠을 때 독립을 위해 투신한 독립유공자들이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임하면금소동과 신덕리의 시위...

    의혈의 고장 금소 이미지2

    임하면 3·1운동은 금소동의 임찬일(林 逸)이 고종인산에 참가하고 독립선언서를 가져오면서 모의되었다. 금소동 금양의숙(錦陽義塾)에서 수학한 임찬일은 고종 장의에 참례하기 위해 상경하여 봉도단(奉悼團)에 가입하였다. 그는 귀향 후 즉시 안동의 김원진과 논의하고 선언서를 준 후 동지규합에 나섰다. 이때 규합된 동지인 노말수(盧末守)·임동숙(林東淑)·임윤익(林潤益)·손응돌(孫應乭)·류북실(柳北實)·임춘섭(林春燮)·임범섭(林範燮) 등이었다. 이들은 길안 장날인 3월 16일에 거사하기로 결의하였으나, 당일에 호응자가 적어 다시 3월 21일로 정하였다.

    21일 밤, 백여 명의 금소 동민들은 마을 앞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면소재지인 신덕으로 몰려갔다. 신덕 주재소에 몰려간 군중들은 일경의 위협 발포로 한때 해산했으나 밤 9시경 다시 3백여 명의 군중들이 주재소에 밀고 들어가서 일부는 몽둥이를 들고 돌을 던지기도 하였다. 이때 순사 2명이 뒷산으로 도망가서 발포 해산시키려 할 즈음 시위군중들은 주재소의 문과 유리창을 부수고 호구조사부 등 서류를 파기했으며 벽을 밀어 대부분 넘어뜨렸다. 이때 군중들이 "순사보부터 죽여라"고 고함친 것을 보면 조선인 순사에 대한 악감정이 누적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어서 군중들은 면사무소도 파괴하였다.

    3월 21일의 임하시위에서 경찰의 발포가 있었지만 사상자가 없었다. 그러나 그후 안동수비대가 시위 가담자를 체포하러 금소동에 들이 닥쳤고, 이를 피하던 임호일(林浩逸)·임지열(林志烈)·김도주(金道周)·신달석(辛達石)·신필원(辛必元) 등 5명이 3월 26일에 피살되었다.

    <발췌 : 1910·20년대 안동의 사회와 항일투쟁>

    금소 신덕마을 독립유공자

    조복선

    1919년 3월 21일 임하면 금소동·신덕동(臨河面琴韶洞·新德洞)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고 임찬일(林燦逸)·김원진(金源鎭)·노말수(盧末守)·임동숙(林東淑)·임윤익(林潤益)·유북실(柳北實)·임춘섭(林春燮)·임범섭(林範燮)·박유석(朴有石)·임석현(林錫鉉) 등과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는 처음에는 동지들과 3월 16일의 길안(吉安)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계획하였으나, 3월 21일 금소동에서 시작하여 경찰주재소와 면사무소가 위치하고 있는 신덕동으로 시위행진하기로 계획을 변경하였다. 3월 21일 오후 6시경, 금소동에 모인 3백여명의 시위군중은 독립만세를 외친 뒤, 신덕리로 시위행진하였다. 이날 오후 9시경, 신덕리에 도착한 시위군중은 경찰주재소를 포위하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러나 주재소에서 경비중이던, 일본 경찰의 무차별 발포로 말미암아 약간의 사상자가 발생하자 일단 후퇴하였다. 오후 11시, 사상자가 발생함에 따라 격분을 참지못한 그는, 5백여명으로 늘어난 시위군중과 함께 다시 주재소로 달려가 몽둥이와 돌로 건물과 기물을 파괴하고 서류를 파기하였다. 이같은 시위군중의 위세에 눌린 일본 경찰은 급히 뒷산으로 도망하였다. 이어 시위군중은 면사무소로 몰려가서 다시 건물과 기물을 파괴하고 서류를 대부분 파기하였다. 이튿날 일제는 병력을 보강하여 주동자를 검거하였는데, 결국 그는 이때에 체포되었으며, 이해 7월 4일 대구(大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및 소요 혐의로 1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8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註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3卷 404面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5卷 1355·1356面

    임동숙

    1919년 3월 21일 임하면 금소동·신덕동(臨河面琴韶洞·新德洞)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고 임찬일(林燦逸)·김원진(金源鎭)·노말수(盧末守)·손돌이(孫乭伊)·임윤익(林潤益)·유북실(柳北實)·임춘섭(林春燮)·임범섭(林範燮)·박유석(朴有石)·임석현(林錫鉉) 등과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는 처음에는 동지들과 3월 16일의 길안(吉安)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계획하였으나, 3월 21일 금소동에서 시작하여 경찰주재소와 면사무소가 위치하고 있는 신덕동으로 시위행진하기로 계획을 변경하였다. 3월 21일 오후 6시경, 그는 금소동에 모인 3백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친 뒤, 신덕리로 시위행진하였다. 이날 오후 9시경, 신덕리에 도착한 시위군중은 경찰주재소를 포위하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러나 주재소에서 경비중이던, 일본 경찰의 무차별 발포로 말미암아 약간의 사상자가 발생하자 일단 후퇴하였다. 오후 11시, 사상자가 발생함에 따라 격분을 참지 못한 그는, 5백여명으로 늘어난 시위군중과 함께 다시 주재소로 달려가 몽둥이와 돌로 건물과 기물을 파괴하고 서류를 파기하였다. 이같은 시위군중의 위세에 눌린 일본 경찰은 급히 뒷산으로 도망하였다. 이어 그는 면사무소로 몰려가서 다시 건물과 기물을 파괴하고 서류를 대부분 파기하였다. 이튿날 일제는 병력을 보강하여 주동자를 검거하였는데, 결국 그도 이때에 체포되었으며, 이해 7월 4일 대구(大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및 소요 혐의로 1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8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註 · 受刑人名簿

    · 三·一運動實錄(李龍洛) 744∼746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3卷 403·404面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5卷 1355·1356面

    임우민
    임우민

    1919년 3월 21일 임하면 금소동·신덕동(臨河面琴韶洞·新德洞)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고 임찬일(林燦逸)·김원진(金源鎭)·노말수(盧末守)·임동숙(林東淑)·임윤익(林潤益)·유북실(柳北實)·임춘섭(林春燮)·임범섭(林範燮)·박유석(朴有石)·임석현(林錫鉉) 등과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처음에는 동지들과 3월 16일의 길안(吉安)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계획하였으나, 3월 21일 금소동에서 시작하여 경찰주재소와 면사무소가 위치하고 있는 신덕동으로 시위행진하기로 계획을 변경하였다. 3월 21일 오후 6시경, 금소동에 모인 3백여명의 시위군중은 독립만세를 외친 뒤, 신덕리로 시위행진하였다. 이날 오후 9시경, 신덕리에 도착한 시위군중은 경찰주재소를 포위하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러나 주재소에서 경비중이던, 일본 경찰의 무차별 발포로 말미암아 약간의 사상자가 발생하자 일단 후퇴하였다. 오후 11시, 사상자가 발생함에 따라 격분을 참지 못한 그는, 5백여명으로 늘어난 시위군중과 함께 다시 주재소로 달려가 몽둥이와 돌로 건물과 기물을 파괴하고 서류를 파기하였다. 이같은 시위군중의 위세에 눌린 일본 경찰은 급히 뒷산으로 도망하였다. 이어 그는 면사무소로 몰려가서 다시 건물과 기물을 파괴하고 서류를 대부분 파기하였다. 이튿날 일제는 병력을 보강하여 주동자를 검거하였는데, 결국 그도 이때에 체포되었으며, 이해 5월 10일 대구(大邱)복심법원에서 소위 소요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8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註 · 判決文(1919. 5. 10 大邱覆審法院)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5卷 1333·1334面

    임호일

    1919년 3월 21일 임하면 금소동·신덕동(臨河面琴韶洞·新德洞) 일대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임찬일(林燦逸)·김원진(金源鎭)·손돌이(孫乭伊)·노말수(盧末守)·임동숙(林東淑)·임윤익(林潤益)·유북실(柳北實)·임춘섭(林春燮)·임범섭(林範燮)·박유석(朴有石)·임석현(林錫鉉)·조복선(趙卜先) 등의 주동으로 사전에 계획되었는데, 그들은 처음에는 동지들과 3월 16일의 길안(吉安) 장날을 거사일로 계획하였으나, 3월 21일 금소동에서 시작하여 경찰주재소와 면사무소가 위치하고 있는 신덕동으로 시위행진하기로 계획을 변경하고 거사준비를 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그는 이에 적극 찬성하여 3월 21일 오후 6시경, 3백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금소동에 모여 독립만세를 외친 뒤, 신덕리로 시위행진하였다. 이날 오후 9시경, 신덕리에 도착한 시위군중은 주재소를 포위하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러나 사태의 위급함을 느낀 일본 경찰의 무차별 발포로 말미암아 그는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80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註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3卷 404面

    임찬일
    임찬일

    1919년 3월 21일 임하면 금소동·신덕동(臨河面琴韶洞·新德洞)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고 손돌이(孫乭伊)·김원진(金源鎭)·노말수(盧末守)·임동숙(林東淑)·임윤익(林潤益)·유북실(柳北實)·임범섭(林範燮)·임춘섭(林春燮)·박유석(朴有石)·임석현(林錫鉉) 등과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처음에는 동지들과 3월 16일의 길안(吉安)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계획하였으나, 3월 21일 금소동에서 시작하여 경찰주재소와 면사무소가 위치하고 있는 신덕동으로 시위행진하기로 계획을 변경하였다. 3월 21일 오후 6시경, 금소동에 모인 3백여명의 시위군중은 독립만세를 외친 뒤, 신덕리로 시위행진하였다. 이날 오후 9시경, 신덕리에 도착한 시위군중은 경찰주재소를 포위하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러나 주재소에서 경비중이던, 일본 경찰의 무차별 발포로 말미암아 약간의 사상자가 발생하자 일단 후퇴하였다. 오후 11시, 사상자가 발생함에 따라 격분을 참지 못한 그는, 5백여명으로 늘어난 시위군중과 함께 다시 주재소로 달려가 몽둥이와 돌로 건물과 기물을 파괴하고 서류를 파기하였다. 이같은 시위군중의 위세에 눌린 일본 경찰은 급히 뒷산으로 도망하였다. 이어 그는 면사무소로 달려가서 다시 건물과 기물을 파괴하고 서류를 대부분 파기하였다. 이튿날 일제는 병력을 보강하여 주동자를 검거하였는데, 결국 그는 이때에 체포되었으며, 이해 9월 17일 대구(大邱)복심법원에서 소위 소요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2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르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68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註 · 韓國獨立史(金承學) 下卷 249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3卷 403·404面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5卷 1355·1356·1357·1358面

    임춘섭

    1919년 3월 21일 임하면 금소동·신덕동(臨河面琴韶洞·新德洞)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고 임찬일(林燦逸)·김원진(金源鎭)·노말수(盧末守)·임동숙(林東淑)·임윤익(林潤益)·유북실(柳北實)·손돌이(孫乭伊)·임범섭(林範燮)·박유석(朴有石)·임석현(林錫鉉) 등과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처음에는 동지들과 3월 16일의 길안(吉安)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계획하였으나, 3월 21일 금소동에서 시작하여 경찰주재소와 면사무소가 위치하고 있는 신덕동으로 시위행진하기로 계획을 변경하였다. 3월 21일 오후 6시경, 금소동에 모인 3백여명의 시위군중은 독립만세를 외친 뒤, 신덕리로 시위행진하였다. 이날 오후 9시경, 신덕리에 도착한 시위군중은 경찰주재소를 포위하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러나 주재소에서 경비중이던, 일본 경찰의 무차별 발포로 말미암아 약간의 사상자가 발생하자 일단 후퇴하였다. 오후 11시, 사상자가 발생함에 따라 격분을 참지 못한 그는, 5백여명으로 늘어난 시위군중과 함께 다시 주재소로 달려가 몽둥이와 돌로 건물과 기물을 파괴하고 서류를 파기하였다. 이같은 시위군중의 위세에 몰린 일본 경찰은 급히 뒷산으로 도망하였다. 이어 시위군중은 면사무소로 달려가서 다시 건물과 기물을 파괴하고, 서류를 대부분 파기하였다. 이튿날 일제는 병력을 보강하여 주동자를 검거하였는데, 결국 그는 이때에 체포되었으며, 이해 7월 4일 대구(大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및 소요 혐의로 1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8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註 · 三·一運動實錄(李龍洛) 744·745·746面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5卷 1355·1357面

    임윤익

    1919년 3월 21일 임하면 금소동·신덕동(臨河面琴韶洞·新德洞)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고 임찬일(林燦逸)·김원진(金源鎭)·노말수(盧末守)·임동숙(林東淑)·손돌이(孫乭伊)·유북실(柳北實)·임춘섭(林春燮)·임범섭(林範燮)·박유석(朴有石)·임석현(林錫鉉) 등과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처음에는 동지들과 3월 16일의 길안(吉安)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계획하였으나, 3월 21일 금소동에서 시작하여 경찰주재소와 면사무소가 위치하고 있는 신덕동으로 시위 행진하기로 계획을 변경하였다. 3월 21일 오후 6시경, 금소동에 모인 3백여명의 시위군중은 독립만세를 외친 뒤, 신덕리로 시위행진하였다. 이날 오후 9시경, 신덕리에 도착한 시위군중은 경찰주재소를 포위하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러나 주재소에서 경비중이던, 일본 경찰의 무차별 발포로 말미암아 약간의 사상자가 발생하자 일단 후퇴하였다. 오후 11시, 사상자가 발생함에 따라 격분을 참지 못한 그는, 5백여명으로 늘어난 시위군중과 함께 다시 주재소로 달려가 몽둥이와 돌로 건물과 기물을 파괴하고 서류를 파기하였다. 이같은 시위군중의 위세에 눌린 일본 경찰은 급히 뒷산으로 도망하였다. 이어 그는 면사무소로 몰려가서 다시 건물과 기물을 파괴하고 서류를 대부분 파기하였다. 이튿날 일제는 병력을 보강하여 주동자를 검거하였는데, 결국 그도 이때에 체포되었으며, 이해 9월 17일 대구(大邱)복심법원에서 소위 소요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1년 6월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르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8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註 · 三·一運動實錄(李龍洛) 744·745·746面

    · 判決文(1919. 9. 17 大邱覆審法院)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5卷 1355·1356·1358面

    임득연

    1919년 3월 21일 임하면 금소동·신덕동(臨河面琴韶洞·新德洞)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고 임찬일(林燦逸)·김원진(金源鎭)·노말수(盧末守)·임동숙(林東淑)·임윤익(林潤益)·유북실(柳北實)·임춘섭(林春燮)·임범섭(林範燮)·박유석(朴有石)·임석현(林錫鉉) 등과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는 처음에는 동지들과 3월 16일의 길안(吉安)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계획하였으나, 3월 21일 금소동에서 시작하여 경찰주재소와 면사무소가 위치하고 있는 신덕동으로 시위행진하기로 계획을 변경하였다. 3월 21일 오후 6시경, 그는 금소동에 모인 3백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친 뒤, 신덕리로 행진하였다. 이날 오후 9시경, 신덕리에 도착한 시위군중은 경찰주재소를 포위하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러나 주재소에서 경비중이던, 일본 경찰의 무차별 발포로 말미암아 약간의 사상자가 발생하자 일단 후퇴하였다. 오후 11시, 사상자가 발생함에 따라 격분을 참지 못한 그는, 5백여명으로 늘어난 시위군중과 함께 다시 주재소로 달려가 몽둥이와 돌로 그곳을 습격하여 건물과 기물을 파괴하고 서류를 파기하였다. 이같은 시위군중의 위세에 눌린 일본 경찰은 급히 뒷산으로 도망하였다. 이어 그는 면사무소로 몰려가서 다시 건물과 기물을 파괴하고 서류를 대부분 파기하였다. 이튿날 일제는 병력을 보강하여 주동자를 검거하였는데, 결국 그도 이때에 체포되었으며, 이해 5월 10일 대구(大邱)복심법원에서 소위 소요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1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르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8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註 · 三·一運動實錄(李龍洛) 745面

    · 名籍表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5卷 1333·1334面

    임지열

    그는 1919년 3월 21일 경북 안동군 임하면(臨河面) 금소동(琴韶洞)에서 3백여명과 함께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임하면 금소동의 만세운동은 광무황제(光武皇帝) 인산(因山)에 참가하기 위해 상경했던 임찬일(林燦逸)이 서울에서 3·1운동의 광경을 직접 목격하고 돌아와 동리 유지들에게 만세소식을 전하면서 비롯되었다. 이 때 임찬일은 독립선언서 수십매를 비밀리에 가져와 노말수(盧末守)·임동숙(林東淑)·임범섭(林範燮) 등에게 전달하고, 독립에 대한 의지 표명으로써 만세시위를 일으킬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뜻을 모으고, 처음에는 길안(吉安) 장날인 3월 16일에 거사하기로 계획을 세웠으나, 준비 과정에서 거사일을 다음 장날인 3월 21일로 변경하였다. 이들은 금소동에서 거의하여 일제 기관인 주재소와 면사무소가 있는 신덕동(新德洞)으로 진격할 계획을 세워 놓았다. 이에 따라 임지열 등은 거사 당일인 3월 21일 오후 6시경 금소동에서 군중 3백여명과 함께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뒤, 신덕동으로 향하였다. 오후 9시 경 시위 군중은 신덕동 주재소를 포위하고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경은 시위군중을 향하여 무자비하게 총격을 가했는데, 이 때 시위군중의 선봉에 서서 만세운동을 전개하던 임지열은 일경의 총탄에 맞아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9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註 · 三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3卷 404面

    임범섭
    임범섭

    1919년 3월 21일 임하면 금소동·신덕동(臨河面琴韶洞·新德洞)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고 임찬일(林燦逸)·김원진(金源鎭)·노말수(盧末守)·임동숙(林東淑)·임윤익(林潤益)·유북실(柳北實)·임춘섭(林春燮)·손돌이(孫乭伊)·박유석(朴有石)·임석현(林錫鉉) 등과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는 처음에는 동지들과 3월 16일의 길안(吉安)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계획하였으나, 3월 21일 금소동에서 시작하여 경찰주재소와 면사무소가 위치하고 있는 신덕동으로 시위행진하기로 계획을 변경하였다. 3월 21일 오후 6시경, 그는 금소동에 모인 3백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친 뒤, 신덕리로 행진하였다. 이날 오후 9시경, 신덕리에 도착한 시위군중은 경찰주재소를 포위하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러나 주재소에서 경비중이던, 일본 경찰의 무차별 발포로 말미암아 약간의 사상자가 발생하자 일단 후퇴하였다. 오후 11시, 사상자가 발생함에 따라 격분을 참지 못한 그는, 5백여명으로 늘어난 시위군중과 함께 다시 주재소로 달려가 몽둥이와 돌로 건물과 기물을 파괴하고 서류를 파기하였다. 이같은 시위군중의 위세에 눌린 일본 경찰은 급히 뒷산으로 도망하였다. 이어 그는 면사무소로 몰려가서 다시 건물과 기물을 파괴하고 서류를 대부분 파기하였다. 이튿날 일제는 병력을 보강하여 주동자를 검거하였는데, 결국 그도 이때에 체포되었으며, 이해 7월 4일 대구(大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1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8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註 · 受刑人名簿

    · 三·一運動實錄(李龍洛) 744·745·746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3卷 403·404面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5卷 1355·1356面

    임돌이

    1919년 3월 21일 임하면 금소동·신덕동(臨河面琴韶洞·新德洞)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고 임찬일(林燦逸)·김원진(金源鎭)·노말수(盧末守)·임동숙(林東淑)·임윤익(林潤益)·유북실(柳北實)·임춘섭(林春燮)·박유석(朴有石)·임석현(林錫鉉) 등과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는 처음에는 동지들과 3월 16일의 길안(吉安)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계획하였으나, 3월 21일 금소동에서 시작하여 경찰주재소와 면사무소가 위치하고 있는 신덕동으로 시위행진하기로 계획을 변경하였다. 3월 21일 오후 6시경, 그는 금소동에 모인 3백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친 뒤, 신덕리로 행진하였다. 이날 오후 9시경, 신덕리에 도착한 시위군중은 경찰주재소를 포위하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러나 주재소에서 경비중이던, 일본 경찰의 발포로 말미암아 약간의 사상자가 발생하자 일단 후퇴하였다. 오후 11시, 사상자가 발생함에 따라 격분을 참지 못한 그는, 5백여명으로 늘어난 시위군중과 함께 다시 주재소로 달려가 몽둥이와 돌로 건물과 기물을 파괴하고 서류를 파기하였다. 이같은 시위군중의 위세에 눌린 일본 경찰은 급히 뒷산으로 도망하였다. 이어 그는 면사무소로 몰려가서 다시 건물과 기물을 파괴하고 서류를 대부분 파기하였다. 이튿날 일제는 병력을 보강하여 주동자를 검거하였는데, 결국 그도 이때에 체포되었으며, 이해 7월 4일 대구(大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및 소요 혐의로 1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8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註 · 受刑人名簿

    · 三·一運動實錄(李龍洛) 744·745·746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3卷 403·404面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5卷 1355·1356面

    신필원

    1919년 3월 21일 임하면 금소동·신덕동(臨河面琴韶洞·新德洞) 일대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을 참여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임찬일(林燦逸)·김원진(金源鎭)·손돌이(孫乭伊)·노말수(盧末守)·임동숙(林東淑)·임윤익(林潤益)·유북실(柳北實)·임춘섭(林春燮)·임범섭(林範燮)·박유석(朴有石)·임석현(林錫鉉)·조복선(趙卜先) 등의 주동으로 사전에 계획되었는데, 그들은 처음에 3월 16일 길안(吉安) 장날을 거사일로 계획하였으나, 3월 21일 금소동에서 시작하여 경찰주재소와 면사무소가 위치하고 있는 신덕동으로 시위행진하기로 계획을 변경하고, 거사준비를 하였다. 이 계획을 전해 들은 그는 이에 적극 찬성하여 3월 21일 오후 6시경, 3백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금소동에 모여 독립만세를 외친 뒤 신덕리로 시위행진하고 이날 오후 9시경, 신덕리에 도착한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주재소를 포위하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러나 사태의 위급함을 느낀 일본 경찰의 무차별 발포로 말미암아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8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註 · 三·一運動實錄(李龍洛) 744∼746面

    · 三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3卷 404面

    손돌이

    1919년 3월 21일 임하면 금소동·신덕동(臨河面琴韶洞·新德洞)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고 임찬일(林燦逸)·김원진(金源鎭)·노말수(盧末守)·임동숙(林東淑)·임윤익(林潤益)·유북실(柳北實)·임춘섭(林春燮)·임범섭(林範燮)·박유석(朴有石)·임석현(林錫鉉) 등과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의하였다. 처음에는 동지들과 3월 16일 길안(吉安)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을 일으킬 계획이였으나 현지사정으로 3월 21일로 계획을 변경하였다. 3월 21일 오후 6시경 그는 금소동에 모인 3백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친 뒤 신덕리로 시위행진하고 이날 오후 9시경, 신덕리에 도착한 시위군중은 경찰주재소를 포위하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러나 주재소를 경비중이던, 일본 경찰이 시위군중의 위세에 놀라 발포를 하게 되어 약간의 사상자가 발생하자 시위군중은 일단 후퇴하였다. 오후 11시경, 사상자 발생으로 격분을 참지 못하고 있는 5백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몽둥이와 돌을 들고 주재소를 습격하고 건물과 기물을 파괴하고 서류를 파기하니, 시위군중의 위세에 눌린 일본 경찰은 급히 뒷산으로 도망하였다. 시위군중은 계속하여 면사무소로 몰려가서 다시 건물과 기물을 파괴하고 서류 등을 파기하였다. 이튿날 일제는 병력을 보강하여 주동자를 검거하였는데, 결국 그는 이때에 체포되었으며, 이해 9월 1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1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8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註 · 三·一運動實錄(李龍洛) 744∼746面

    · 判決文(1919. 9. 19 大邱覆審法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3卷 403·404面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5卷 1355·1356·1358面

    김징로

    그는 1919년 3월 21일 경북 안동군 임하면(臨河面) 금소동(琴韶洞)에서 3백여 명과 함께 독립만세를 전개하였다. 임하면 금소동의 만세운동은 광무황제(光武皇帝) 인산(因山)에 참가하기 위해 상경했던 임찬일(林燦逸)이 서울에서 3·1운동의 광경을 직접 목격하고 돌아와 동리 유지들에게 만세소식을 전하면서 비롯되었다. 이 때 임찬일은 독립선언서 수십매를 비밀리에 가져와 노말수(盧末守)·임동숙(林東淑)·임범섭(林範燮) 등에게 전달하고, 독립에 대한 의진 표명으로써 만세시위를 일으킬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뜻을 모으고, 처음에는 길안(吉安) 장날인 3월 16일에 거사하기로 계획을 세웠으나, 준비 과정에서 거사일을 다음 장날인 3월 21일로 변경하였다. 이들은 금소동에서 거의하여 일제 기관인 주재소와 면사무소가 있는 신덕동(新德洞)으로 진격할 계획을 세워 놓았다. 이에 따라 김징로 등은 거사 당일인 3월 21일 오후 6시경 금소동에서 군중 3백여명과 함께 독립선언서을 거행한 뒤, 신덕동으로 향하였다. 오후 9시 경 시위 군중은 신덕동 주재소를 포위하고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그러던 중 일경이 시위군중 향하여 무자비하게 총격을 가함으로써 임지열 등 세명의 청년이 일경의 총탄에 맞아 현장에서 순국하고 말았다. 이에 격분한 김징로등은 5백여 명의 군중과 함께 오후 11시 경에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점령하면서 만세시위를 계속하였다. 그는 이 일로 피체되어 1919년 5월 6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註 · 身分帳指紋原紙(警察廳)

    · 犯罪人名簿

    ·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國史編纂委員會) 別集 第3輯 16面

    · 3·1運動實錄(李龍洛) 744·745面